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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떠나온 세계』 두려운 과제Essay/Book Review 2021. 11. 17. 19:08
과제를 받았다.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가 신작을 냈다고 수능이 끝나고 읽으려고 미리 사놓았다는 말이 서두였다. 며칠 후에는 곧 온라인 수업으로 전환되며 짐을 빼야 한다는 말과 함께 책을 스윽 밀어놓았다. 선생님도 이 작가의 글을 읽지 않았냐며 읽던지 말던지라며 보관을 부탁한다고 했다. 그러고선 며칠 후에 책은 잘 읽고 계시냐고 점검을 했다. 수능이 끝날 때까지 빨리 읽어 놓으라는 소리였다. 학생에게 과제를 받아버렸다.
과제를 붙들고 최대한 미루는 것은 국룰아니겠는가? 표지만 만지작거리고 집과 학교로 책을 이동시키며 미적거렸다. 그래도 과제는 해야겠기에, 또, 시작했으면 잘해야 하기에 블로그에 글쓰기 창을 열고 먼저 표지를 다운받아 넣었다. 아래 작은 표시는 있지만, 항상 깔끔한 표지를 다운받을 수 있던 Yes24에서 이번에는 책날개까지 포함해서 표지를 올려두었다. 그리고 과연 누가 구성했을까 싶은 표현과 형식이 좀 불편하게 의아스러웠다. '한국 문학의 눈부신 미래', '사랑하지만 끝내 이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신에게도 있지 않나요.', 리고 자연스럽게 부자연스러운 작가 사진까지 이 책에서 무엇을 읽어내야 할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책을 펼치는데 오래 걸렸다. 그래. 변명이다.
과제를 받았다.
이 책은 내게 또다른 과제를 던져주었다. 한국 문학의 눈부신 미래답게 김초엽 작가는 놀라운 상상으로 SF소설을 이끌어간다. SF 속 세계에 공감할 수 있게 하는 요소이자 상상 세계 속 핵심은 '몸'이었다. 인간으로서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 몸을 어떻게 극복하고, 감각하고, 인식하는지는 작가의 소설의 핵심이었다. 아니, 분명히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는 다른 것이 있으나 내게는 이 내용이 더욱 중요했다. 몸을 다루고 가르치는 직업인으로서 난 그것을 체육의 방식으로 해석해야만 했다. 또 다른 과제를 받아버렸다.
첫 작품인 「최후의 라이오니」는 몸의 극복이었다. 신체 복제와 기억 전송이라는 월등한 생명공학 기술로 불멸의 삶을 살았던 문명을 소설의 배경으로 한다. 이 관점에서는 작가는 마치 데카르트가 Cogito ergo sum을 다시 외치는 것 같이 신체와 정신을 완전히 분리하고 정신의 손을 들어준다. 송과선을 기어코 찾아내어 복제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 이후 이들의 문명을 말하려는 듯하다. 인간 존재의 주체는 자의식과 기억이 핵심이며 몸은 기술의 발전으로 복제 가능한 객체로 보았다. 인간을 신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야만 하는 존재로서 바라보고 몸을 극복한 어느 세계의 문명이 있음을 상정했다.
이 문명 속에서 신체란 어떤 의미었을까. 신체를 진리와 인식의 근원이라 했던 메를로-퐁티는 이 세계에서는 신체 현상학을 포기했을까? 그의 입장에서 근원적 실체였던 신체가 이 곳에서는 복제되어 다른 자의식을 가지기도 하고 또다른 자의식으로 덮어 씌워진다고 했는데 과연 어떻게 반응했을까? 그럼 체육은 어떨까? 스포츠는 또 존재할 수 있을까? 진정한 승리자가 된 정신은 스포츠의 육체성을 넘어 경쟁과 도전의 정신을 담고 불멸인들을 흥분시켰을까?
다시 돌아와, 몸을 극복하지 못한 현실의 세계로 돌아오자. 체육을 교과로서 가르치는 교사인 나에게 신체는 어떠한 대상인가? 육체적 삶을 지속하기 위한 도구, 정신적 효율성을 보조하기 위한 도구, 스포츠를 참여하기 위한 도구로서 가르치고 있지는 않은가? '줄넘기를 해봐, 건강한 몸을 유지할 수 있거든. 골프를 쳐봐, 심리 기술을 익히고 활용할 수 있거든. 탁구 경기를 해봐, 스포츠를 재밌게 즐길 수 있을 거야.' 나의 수업에서 몸은 주체가 되지 못하고 도구화되어 우리 학생들이 불멸인들이 마침내 달성했던 몸의 극복을 지향하도록 만드는 게 아닌가.
체화(Embodiment)와 실천(Practicing)이 체육 수업에서 활용되는 것으로 이야기를 넘기기에는 너무도 먼 길을 떠나는 것 같으니 한 가지만 남겨두자. 논란의 여지는 항상 있지만, 유럽과 호주에서 꾸준히 시도되고 있다. 신체를 중심으로 두었지만 건강에 집착하지 않는 체육수업이다. 신체를 주관적 경험을 이끄는 주체이자 바탕으로보는 관점은 ØF Standal이 중심이 되어 이론적, 실천적으로 확장해나가고 있다. 그는 Aggreholm, Barker, Larsson과 함께 Movement-oriented Practicing Model이라는 이름으로 수업 모델을 구성하기도 했다. 나 또한 이를 활용하여 수업에 적용해보려는 노력을 했고 AIESEP에 발표를 하기도 했다.두 번째 작품인 「마리의 춤」은 몸의 감각이다. 시각 기능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잃은, 모그라 불리는 사람들이 뇌에 심은 칩을 활용해 플루이드란 방식으로 감각한다는 것이 소설 속 핵심적 상상이었다. 몸이 받아들이는 자극을 시각, 청각, 촉각, 후각, 미각으로 구분하지 않고 더욱 높은 차원의 감각이 있음을 상정한 것이다. 서번트 신드롬처럼 한 기능을 잃고 다른 기능이 특별히 향상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다른 차원의 감각이 있으며 이를 나름 구체적으로 표현해낸 것은 놀랍도록 기발하며 또 현실적이다. 육감(Sixth sense)이 기술과 만나 그 실체를 들어내는 것 같음은 체육을 가르치는 나에게도 의미를 준다.
암묵지(Tacit knowledge)는 체육에서 기능과 기술이 몸에 베어있으나 말이나 글의 형식으로 표현할 수 없는 지식을 말한다. 스포츠에 참여하며 형성된 암묵적 지식은 개인의 몸에 체화되어 새로운 감각을 만들어낸다. '공기의 흐름을 읽는다, 분위기와 기세를 끊는다' 등으로 표현하는 감각이 그것이다. 그 스포츠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는 것, 그것을 명확하게 감각하고 영향을 주고받는 것이 실력인 그것. 뭐라 말하고 표현할 수 없지만(표현되는 순간 암묵지와 감각이 아니게 되는) 꼭 느껴야 하는 그것. 그것을 어떻게 전달할지는 아직도 아무도 정답을 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주영이의 논문이 그것을 향한 발걸음이었지만, 무겁고 고독한 발걸음이기에 해석되기는 쉽지 않다.
감각에 대한 이야기를 몸에 붙여서 이야기했다. 소설은 그저 완전히 새로운 감각을 이야기했는데 몸을 강조하는 이유는 이 감각은 분명 몸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존재함으로 특별한 감각이 증명되기 때문이다. 스포츠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수업 중 학생들을 만나며 그 감각을 키워온 선생님들이 온라인 수업으로 그것이 제한되었을 때 느꼈던 어려움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몸을 사용하고 대면하는 모든 순간에 이러한 감각은 존재한다. 그것이 특화되어 드러나는 곳이 스포츠 세계일 뿐이다. 이런 것을 우리나라에서는 눈치라고도 부르지만 그것으로 충분히 표현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 감각을 다룰 수 있는 것은 다시 몸을 사용하는 체육시간 뿐이다.세 번째 작품인 「로라」는 몸의 인식이다. 몸 정체성 통합장애란 이름으로 자신의 실제 몸과 인식이 다른 사람들을 다룬다. 내가 가진 몸을 실재하는 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다리가 없다거나, 팔이 없다거나 하는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자신이 인식하는 몸에는 손이 없는데 손이 실제로는 존재하니 그것 사이에서 혼란을 겪으며 어느 것을 추구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것이다. 그리고 현실 세계로 돌아온 우리는 너무도 쉽게 '몸 정체성 통합장애'의 사례를 발견할 수 있다.
1학년 1학기 수업으로 신체인식 수업을 한 적이 있다. 요가 수업을 진행하며 학생들이 성찰일지에 자신의 몸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기에 시간을 들였다. 자신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몸은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형성이 되었는지를 생각해보았다. 미디어나 SNS는 어떻게 우리에게 이상적인 몸의 이미지를 형성하고 강화하는지를 살펴보며, 건강하고 효율적인 몸은 다양할 수 있음을 종목별 운동선수의 신체를 통해 돌아봤다. 그리고 자신의 몸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지 않되 꾸준히 들여다보며 나의 건강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함을 생각해보았다.
너무나 중요하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수많은 인플루언서들이, 무대를 찢어놓는 아이돌들이 가진 몸의 이미지는 나의 정체성을 왜곡시킨다. 나를 나로 보지 못하고 다른 그 누군가가 되길 바란다. 신체는 누군가에게 가장 먼저 파악되는 나의 모습이고 그것에 자신감을 잃으며 모든 것에서 비틀어지기 시작한다. 누구는 누구보다 더 낫다며 평가하고, 멋진 사람이라며 동경하고, 도달할 수 없는 몸에 나의 몸을 끼워 넣으려 한다. 그리고 그것이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 절망한다.
자신의 몸을 어떻게 인식하는지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나를 어떠한 모습으로 바꿔놓을 수 있다고 하더라고 그것은 존재할 수 없는 모습이기에 도달할 수도 없다. 나를 나로 받아들이고 존중하는 것만이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리고 체육시간이 우리에게는 그런 시간이어야 한다. 누군가의 우월함을 강조하며 그렇게 되어야 함을 강요하기보다는, 자신을 인정하고 꾸준히 돌아보아야함을 알려주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요가소년에게 매우 감사하다. 요가소년이 하는 말은 위안이고 위로고 지향점이었다. '괜찮습니다. 누구나 자신의 수련이 있습니다.' 나의 수업도 이런 수업이 되길 바란다.이정도면 과제를 잘 수행한 거라 들었으면 좋겠다. 책을 읽고 생각을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